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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잎새에도" 그는 "빛"이였다...
2017년 10월 25일 02시 37분  조회:2531  추천:0  작성자: 죽림


<윤동주 생각> / 마광수


정지용의 서문이 붙은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처음 간행된 것은
1948년이다. 
그러나 해방이 가져다준 감격의 소용돌이속에서 오랫동안 잊혀져 왔던
윤동주를 문학적으로 재평가하고,
그에게 정당한 위치를 찾아주려는 노력이 활발하게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였다.

윤동주의 생애는 지극히 짧은 것이었다. 
그는 1917년 12월30일 북간도 용정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학문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고 애국정신이 강했으며
경제적으로도 넉넉한 편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할아버지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간도로 이주하여
개척사업과 교육사업에 공헌한 지도적 인사였고, 
아버지 또한 학교 교원으로 일했다고 돼있어 지사적 기개가 넘친 집안임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조부와 부친이 똑같이 그곳 교회에서 장로직을 맡은 것으로 보아
윤동주의 성장배경에는 가정적으로 
기독교적 분위기가 상당히 강했던 것 같다.

아동잡지 `어린이'의 애독자였던 그의 어릴 적 이름은 해환이었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마치고 중국인 관립학교에서 공부하다가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에 전입했다. 그
러나 숭실중학교가 신사참배문제로 문을 닫고 일본 사람손에 접수되자
용정으로 돌아와 광명중학교에 전입하였다.

그즈음부터 동시를 많이 써서 `카톨릭 소년'지에 `빗자루'(36년) `병아리' (36년) 등을
`동주'란 이름으로 발표했다. 
1938년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1941년 11월에 졸업한다. 
이때 스스로 추려 뽑은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자비출판하려 했으나
일본경찰의 단속을 걱정한 스승 
이양하의 만류로 단념하고 후일 1942년 초 `평소동주(平沼東柱)'란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했으며 
동년 4월 일본 동경의 입교 대학 영문과에 입학했으나 가을에
경도의 동지사대학 영문과로 전학하였다. 
1943년 여름방학에 귀국하려던 그는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고문섞인 취조를 받았다. 
결국 그는 1945년 2월16일 28세의 나이로 운명하고 만다.

그는 한.일합방이후에 태어나서 민족광복을 맞이하기 직전에 죽었다. 
그가 시를 썼던 시대(1936년~1943년)는 모든 사람들이 시를 외면했던 때였다.
중일전쟁과 대동아전쟁의 소용돌이속에서 그가 즐겨 바라보던 하늘에서는
공습 경보가 울리고 있었고 
거리에는 군가가 흘러넘쳤다. 그의 시 곳곳에 나타나는 `부끄러움'의 이미지,
그리고 `병원'이나 `위로' 같은 작품에서 
보이는 소외의식에 넘친 절망적인 몸부림은,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창백하고 무기력한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자기자신을 한탄하는 윤동주의 처절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에 자연을 소재로 한 상징적 어구들이 자주 보이는 것도
그 당시 문학인들에게 만연했던 현실도피, 
자연귀의의 사조와 아주 무관하진 않다. 
그러므로 윤동주는 저항시인이 아니라 순수한 휴머니스트로 보아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의 시 어느 곳에도 저항의 기백은 나타나 있지 않다. 
그가 옥사한 것은  시대를 잘못 태어난 양심적 지식인의
억울한 비명횡사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는 깊은 애정과 폭넓은 이해로 인간을 긍정하면서도
실제로는 회의와 혐오로 자신을 부정한, 
어찌 보면 결벽증에 가까운 휴머니스트였다.
그는 변변한 연애 한번 못해보고 낭만적인 폭음 또한 멀리했던,
당시로 보면 `시인답지 않은 시인'이었다. 
기독교 가정에 기독교 학교로만 일관한 그의 환경이
그를 청교도적 죄의식으로 이끌어갔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남에 대한 애정이 곧 자기자신에대한 자괴감(自愧感)과
부정의식으로 변모하는 그의 인생관이 그의 시 곳곳에 나타나 있다. 
`투르게네프의 언덕' `간' `쉽게씌어진 시' 같은 작품이 그 보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윤동주를 투쟁적 이미지의 저항시인으로 보지 않고
회의적 휴머니스트로 본다고 해서
그의 시의 가치가 깎여지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스스로에 진짜로 `솔직한'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시의 가치가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함께 생각될 수는 없다. 
시는 시인의 자기통찰과 자기연민,그리고 본능적 욕구의 대리배설로 이루어질 때
한결 진솔한 감동을 준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윤동주의 저항은 끊임없는 자기 내면
또는 본능적 자의식과의 투쟁이었다. 
이러한 `투쟁'이야말로 진정한 `저항'이 되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스스로의 시인 기질에 따른 시인으로서의 역할을 잘 자각하고 있었던 그는 시
가 정치나 이데올로기에 참여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욕구와 비애를 시창작을 통해서 극복하려고 했으며 
철저한 자기분석을 통해서 자아의 변증법적 발전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가 목표했던 저항의 대상은 외부로부터의 물리적 압박이나
조국의 현실이 아니라 바로 자기자신이었다. 
`자화상' `참회록' `또 다른 고향' 등의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그의 내적 투쟁의 기록을 역력히 읽을 수가 있다.

특히 그의 시에 나타나는 자학적이며 자기부정적인 이미지의 대표적 보기를 들면
이 점이 분명해진다. 
앞서 말했듯 `부끄러움'이란 시어가 나오는 작품이 10편이나 되는데, 
이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시인들이 표피적 정서나
표피적 이데올로기(또는 사상)만을 좇는 경향과 비교해 보면 
가히 파격적이리만큼 독특한 문학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무언가를 `부르짖거나' `가르치거나' `과장적으로 흐느끼는' 대신
스스로를 `발가벗기고' 있는 것이다. 
물론 윤동주의 `발가벗기'는 다분히 실존적 현학의 냄새나
종교적 형이상성의 냄새를 풍기는 발가벗기이다.
그래서 좀더 자신의 심층아래로 내려가 본능적 욕구를 발가벗기는 데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은 아쉬움을 느끼게 한다. 
그렇지만 그는 `퓨리터니즘'이라는 옷을 태어날 때부터 두텁게 입을 수밖에 없었고  
또 그 당시 지식인들의 정신적 정황이 본능보다는
관념에 치우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윤동주의 `발가벗기' 정도만 가지고서도 우리 문학사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고 본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의 문학은 이광수류의 계몽적 시혜주의에서
한발자욱도 못벗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윤동주 시의 또 다른 장점은 
그가 어느 계파나 유행에 연연하지 않고 스스로의
독자적 시세계를 구축해 나갔다는 사실이다. 
1930년대라면 대부분의 시들이 정지용류의 감각적 서정주의나
카프식의 정치적 이데올로기 시, 둘 중 하나일 때였다. 
또 자연을 노래한다고 해도 전원주의적 회고주의가 고작이었고 
윤동주처럼 자연을 내적 갈등의 상징으로 응용한 시인은 없었다. 
남들이 모더니즘이니 초현실주의니 하고 외국의 유행사조에 민감해 있을 때 
그는 다만 일기를 써나가는 형식이나 경향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의 심경을 담담히 고백해 나갔던 것이다.

나는 문학은 문학일 뿐 그것이 문학이상의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엄청난 힘'이란 문학이 혁명가나 사제의 역할까지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문학은 문학 나름대로의 `힘'을 어찌됐든 가지고 있다. 
그 힘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요,
정신중에서도 이성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이나 감각 또는 본능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은 정치나 이데올로기처럼 
단기간에 효력을 나타낼 수는 없다.
문학의 효력은 서서히 나타나 인간의 의식 자체를 변모시킨다.

여기서 말하는 `의식'이란 이성과 감성, 본능과 도덕이 합쳐서 이룩되는, 
보다 통체적인 직각(直覺)의 양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윤동주는 옥사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절대로 `총각귀신'이 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이상하게도 
`투사'보다는 `유약하지만 솔직한 사람'을
한 시대의 상징적 희생물로 만드는 일이 많다. 
윤동주는 바로 그러한 역사의 희생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일제말 암흑기,우리 문학의 공백을
밤하늘의 별빛처럼 찬연히 채워주었다.

(마광수 저 : <윤동주 연구>(철학과현실사 발행) 중에서) 

 

 
 

=========================덤으로 <참조하기>...


 

    윤동주의 부끄러움과 마광수 /김동렬


    마광수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만날 기회가 있었다면 말이다. 마광수의 제자 되는 분이 팟캐스트에 나온 적은 있지만 의미 있는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리고 오늘 마광수는 떠났다. 나의 궁금증은 영영 풀 수 없게 되었다.


    내가 물어보고 싶었던 것은 마광수가 규명한바 윤동주의 시를 관통하는 정서인 부끄러움이 동성애 코드와 관련이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아마 아닐 것이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나의 궁금증은 묻힐 것이다. 윤동주는 27살에 죽었다. 기형도 시인은

28살에 죽었다.


    나는 마광수의 얼굴에서 쓸쓸한 그림자를 보았다. 나만 그의 얼굴에서 그것을 본 것은 아닐 터이다. 그는 운명적으로 외로웠다. 사회의 냉대 때문만은 아니다. 냉대는 오히려 맞대응의 투지를 불러일으킨다. 그 이상이다. 기형도 시인은 마광수가 발굴해 등단시켰다.


    그는 28살에 지금은 없어진 파고다 극장에서 뇌졸중으로 죽었다. 게이들의 집합처로 알려진 곳이다. 윤동주, 기형도, 마광수 셋 다 자녀도 없이 외롭게 살았다. 정확한 내막은 모르겠으나. 필자가 말하려고 하는건 세 사람에게 공통으로 느껴지는 독특한 분위기다.


    그것은 자기애다. 나르시시즘이다. 왜 그들은 자신을 탐닉하는 것일까? 자신에게 흥미가 있으니까. 야한 여자가 좋다는 마광수의 말은 모순된다.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은 나는 권력이 좋더라 이렇게 대놓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권력을 빼앗기는 수가 있으니까.


    야한 여자가 좋다고 선언하면 야한 여자가 도망간다. 그것은 마치 호랑이가 나는 사슴이 좋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사슴이 그 말 듣고 호랑이를 피한다. 위험한 자기소개다. 필자가 자기소개를 말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상대방의 호응을 구하는 절차가 필요한 거다.

 

    일방적인 호소는 무례하다. 마당쇠가 주인집 마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 멍석말이를 당한다. 마광수는 다수의 호응을 기대했지만 한국인들은 호응하지 않았다. 남자도 호응하지 않았고 여자도 호응하지 않았고 제자들은 교재를 구매하지 않았다. 외로워진 거다. 

 

    왜 남자들은 야한 여자가 좋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않을까? 좋지 않으니까. 사실 대부분 남자는 야한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더욱 좋아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위선이 아니다. 남자에게 야한 것은 비현실적인 것이다. 그것은 판타지 속에나 머물러야 한다.


    가슴이 강조된 여자 게임 캐릭터처럼 말이다. 비현실이 현실에 쳐들어오면 남자는 당황하게 된다. 예컨대 이런 거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 여자는 입구 쪽에 서고 남자는 뒤쪽에 가서 선다. 남자는 자기 뒤에 누가 서 있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왜? 공격당할까 봐.


    누가 뒤통수를 흉기로 가격할지 모른다. 여자는 반대다. 여자는 등을 돌려 남자의 음흉한 시선을 방어한다. 남자가 운전하는 승용차의 뒷좌석에 여자가 앉으면 결례가 된다. 뒷좌석은 조폭 보스가 앉는 자리다. 뒤로부터 공격받을 일이 없는 안전한 자리가 되니까.


    무엇인가? 야한 상황은 남자에게 위태로운 상황이다. 이해했는가? 개를 데리고 산책을 가보자. 개는 자기 냄새를 감추려고 하므로 집에서는 배변을 하지 않는다. 주인과 산책을 나가서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몰래 배설해야 한다. 주변을 살피며 안절부절못한다.


    빙글빙글 맴을 돌다가 배변하는 개도 있다. 그 순간은 개 입장에서 취약한 상황이고 공격받을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새끼를 낳는 동물은 신음소리도 내지 않는다. 극심한 출산의 고통을 느끼지만 절대 고통을 표현하지 않는다. 나의 출산사실을 알리지 말라.


    출산한 즉시 태반을 먹어치워 증거를 인멸한다. 새끼가 배설을 하면 핥아서 냄새를 지운다. 자신의 약한 고리가 되는 지점을 들키지 않는 것이 동물의 살아남기 전략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야한 상황은 인간에게 위태로운 상황이다. 들키면 안 된다. 말하면 안 된다.


    야한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여자다. 야하다는 것은 여성의 권력이기 때문이다. 여자는 야한 것을 무기로 삼아 남성을 조종할 수 있다. 그렇다. 마광수는 남자 마음을 대변한 것이 아니라 여자의 입장을 대변한 거다. 여자들이 차마 못 하는 말을 대신해준 것이다.

 

    레이디 가가나 마돈나, 김완선의 전성기 패션에는 야한 것을 무기로 삼아 남성을 조종하겠다는 권력자의 카리스마가 있다. 여성들은 강렬한 호피무늬 옷이나 땡땡이 의상 혹은 가죽벨트에 번쩍거리는 금속성 악세서리를 달아서 그러한 동물적 카리스마를 표현한다. 

 

    과거에 정양이라는 예명으로 수술한 가슴을 내세워 화보를 찍은 연예인이 있었는데 온라인으로 사진을 다운받아 볼 수 있었다. 돈을 내고 사진을 다운받은 사람은 당연히 남자였을 거라는 편견은 보기 좋게 깨졌다. 여자의 가슴을 훔쳐보는 사람은 다수가 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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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가 여자의 가슴을 훔쳐보는 사진은 인터넷에 많다. 제인 러셀의 가슴을 훔쳐보는 마릴린 몬로의 사진이 그러하다. 남자가 야한 것을 보면 마음이 끓어오른다. 그것은 강한 스트레스다. 왜냐하면 그 순간 숨을 쉬지 않기 때문이다. 100미터 경주는 무호흡경기다.


    사람은 중요한 순간에 본능적으로 호흡을 멈춘다. 호흡을 하면 에너지를 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격선수는 호흡을 멈추고 총을 발사한다. 타자는 호흡을 멈추고 자세를 잡는다. 권투선수는 호흡을 멈추고 가격한다. 격투기 선수는 상대방의 호흡을 읽고 들어간다.


    호흡을 읽히면 죽는다. 이런 것을 액션영화로 묘사할 줄 아는 제대로 된 감독을 나는 발견하지 못했으니 유감이다. 이소룡 영화에 살짝 묘사되기는 하지만. 풀쩍풀쩍 뛰면서 리듬을 타면서 척 노리스를 두들겨주는 것이다. 상대방을 자기 리듬에 끌어들여 패준다.


    웃을 때 웃음소리가 크게 나는 이유는 놀라서 순간적으로 호흡을 멈추었다가 알고 보니 별거 아니라서 발작적으로 호흡을 재개하기 때문이다. 미소를 지어보면 알 수 있다. 어린이가 TV에서 야한 장면을 보게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 눈을 가리는 것과 같다.


    어린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인간의 순수한 본래다. 그러므로 남자는 야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내숭 떠는 게 아니라 진짜로. 왜? 그 순간은 극도로 취약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공격받을 수 있다. 개도 자기 약점을 드러내는 행동을 대놓고 하지는 않는다.


    부끄럽다는 말은 취약하다는 말과 같다. 민망하다는 것은 타인에게 약점을 들킨 위태로운 상황이다. 그럴 때 얼어붙는다. 마광수는 남자를 오해했다. 자신이 생각한 것을 남도 생각할 것으로 믿었다. 뭐든 위에서 내려다보면 작아 보인다. 모니터로 테스트할 수 있다.


    눈높이에 따라 피사체가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한다. 맹수가 공격할 때는 눈동자가 작아진다. 눈동자가 작으면 김완선 눈처럼 무섭다. 조폭의 사백안이다. 양아치들이 눈 깔어 하고 겁주는 게 그 때문이다. 양아치는 눈을 야린다. 눈동자를 작게 하여 째려본다.


    그게 동물의 공격신호다. 상대방이 작아보여야 공격할 수 있다. 상대방의 동작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장동건처럼 눈이 크면 복서로 성공할 수 없다. 동체시력이 안좋게 된다. 날아오는 공의 궤적을 읽을 수 없다. 상대방의 다음 동작이 전혀 읽히지 않는 것이다.


    목욕탕에서 다른 사람의 것을 보면 커 보이고 자기 것을 내려다보면 각도 때문에 작아 보인다. 그래서 남자는 성기에 대해 콤플렉스가 있다. 욕설에 성기가 등장하는 게 이유가 있다. 욕설은 그것이 공격신호다. 초컬릿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진다. 성기를 떠올리면? 

 

    당연히 불쾌하다. 초컬릿도 좋고 섹스도 좋은데 왜 초컬릿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지고 성기를 떠올리면 기분이 나빠질까? 섹스는 취약한 상황이다. 누가 쳐다보면 하던 섹스도 멈추게 된다. 포르노배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사람이 힘을 쓸 때는 피를 모아야만 한다.

 

    피가 하체로 이동해 있으므로 힘을 쓸 수 없는 취약한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능적인 불쾌감을 느낀다. 마광수는 남자의 원초적 본능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그는 한국이 야한 사회가 될 것으로 전망했지만 그렇지가 않다. 한국사회는 여전히 보수적이다.


    한국 남자들은 공격당할까 봐 전전긍긍하며 살아가고 있다. 공격당할 위험이 없어져야 야할 수 있다. 마광수의 오해다. 야한 상황은 유쾌한 상황이 아니라 자객에게 습격당할 수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며 남자들은 여자의 야한 공격에 방어태세로 가서 자세가 굳었다.


    인터넷에 음란물이 넘쳐나지만, 남자들은 방문을 걸어 잠그고 몰래 본다. 그 순간은 외부의 침입자에게 무방비로 노출되는 취약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마광수가 꿈꾸었던 야한 사회는 당분간 오지 않을 것이다. 한국은 여전히 안전하지가 않은 사회이기 때문이다.


    야한 것은 여자의 무기다. 여자는 얼마든지 야할 수 있다. 공격받을 걱정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절대 공격받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진 제왕은 옛날부터 야했다. 이건희도 여자를 끌어들이다 죽은 판에 말이다. 이런 건 진지하게 토론해봐야 하는데. 알 수 없는 일이다.


   당신은 인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부끄러움이 취약함과 동의어이며 그것이 정글에서 살아남는 과정에 발달시킨 인간의 생존본능임을 당신은 알고 있는가? 우리는 여전히 모르고 있고 필자 역시 모르고 있다는 사실만 확실히 알게 되었다. 쉽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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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한 상황은 여자의 카리스마에 남자가 심리적으로 제압되어 위축된 상황이며 극도로 안전한 경우에만 남자가 이 상황을 받아들입니다. 삶에 찌들어 있는 대다수의 한국인 남자에게 그런 정신적 사치는 비현실입니다. 해외 신혼여행과 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그런 극도로 편안한 심리상태로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면에서 마광수는 정신적 귀족인 거죠. 반대로 그런 극도의 편안하고 안전한 무방비 심리상태를 경험하는 방법으로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자들도 있지요. 샤크티 신앙의 탄트라가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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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트라에서 강조하는 야한 상황은 이런 것입니다. 샤크티 신도들이 섬기는 두르가 여신이 마히사 아수라를 제압하고 있습니다. 아수라의 왕 마히사는 시바의 은총을 받아 모든 적을 이기게 되어 있지만, 오직 여자에게만 패배합니다. 섹스를 은유하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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